아바타는 고대 힌두 신앙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아바타는 산스크리트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한 말로 아바따라는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신이 지상에 강림함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한다.
가까운 미래, 인류는 새로운 자원을 위해 다른 행성 '판도라'로 찾아가게 되고, 현지 원주민인 '나비'족을 만납니다. 판도라 행성에서 인류는 그들의 저항을 받게되고,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그들과 같은 모양을 한, 정신은 인간과 연결이 된 '아바타'를 원주민들에게 보내게 됩니다. 간략히 이 정도가 아바타의 줄거리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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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바타'가 우리가 던지고 있는 요소는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다른 문명간의 조우, 우리의 뒤를 돌아봐서 동서양의 조우라는 측면을 살펴봅시다. 갑자기 동서양의 조우라? 뭔가 어색할까요? 하지만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 앞서 말한 줄거리와도 연관되어있습니다. 돈을 위해 나아간 새로운 세상. 그리고 그곳의 원주민. 문명과 이기를 모르는 그들과의 갈등. 어떤가요? 이미 우리는 엄청난 수의 '판도라'를 겪지 않았던가요?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서, 오세아니아에서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 백인과 조우한 '나비'족은 이미 우리의 조상들이었을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나비'족처럼 신비로운 절대자의 개입이 없었던 탓인지 지구에 있었던 '판도라'들은 무참히 짓밟아지고 뭉개지고 말았죠. 영화속에서 인간은 이러한 전적을 미래에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에 반대하고 동참하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나비'족을 하잘것 없이 여기는 것에는 틀림이 없죠. 실제로 시간이 지나 다른 외계생명체를 만나게 된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과거처럼, 그리고 영화에서 묘사한 것 처럼 행동하게 될까요?
아바타에서는 교감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나비'족과 '판도라'의 동물들과의 교감, '나비'족과 '여신'과의 교감 그리고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교감 등 다양한 교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감을 할 수 있는 것은 '나비'족 뿐이지 인간은 (제이크도 인간이긴 하지만 '나비'족의 모습을 해야만 이러한 교감이 가능했죠) 이들과 마찬가지로 교감을 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교감이란 무엇일까요? 상대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며, 나의 마음을 맞추고 이러한 것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나비'족과 달리 인간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뿐이죠. 이런 자신의 의도로 상대방인 '나비'족, 그리고 더 넓게는 '판도라'행성이 처할 모습을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이익추구에 있어 성가신 장애물로만 여기고 있죠. 근시안인 그들은 결국 대자연적으로 교감을 이룬 '나비'족에게 밀려나고 맙니다. 이는 우리에게 물질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가치 중 후자를 더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요?
또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면 꿈과 현실의 괴리를 들 수 있겠어요. 제이크는 다리를 쓸 수 없는 상이군인입니다. 침대에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어보이고, 클로즈업 된 그의 다리는 비참하리만큼 앙상하기만 하죠. 그러나 그런 그가 아바타와 접속을 하게 되면 양상은 전혀 딴판으로 전개됩니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는 점. 이 것 하나만으로도 그에겐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도움을 주는 토루크와 함께) 자유로이 하늘을 날 수도 있으니, 이는 정말 꿈 같은 세계입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자유로운 세계. 그리고 비참한 현실. 이런 상황에 닥치게 된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전적으로 꿈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세상에 푹 빠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러한 스토리들을 생각하다보면 드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장황하게 써내려가봤지만 이러한 줄거리는 이미 많은 곳에서 수 천번도 더 본듯합니다. 멀게 '늑대와 춤을'까지 갈 필요도 없이 '라스트 사무라이'도 떠오르는군요. 이러한 주제는 우리가 한 두 번 생각한 주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영화부문에서만 보더라도 이미 여러번 우리는 비슷한 내용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또, 너무 전형적이라 대충 생각해도 예상되는 제이크의 학습신과 중력이 지구보다 적다는 행성의 사물들이 별다른 설명도 없는 채 지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허술한(?) 설정 그리고 파괴를 막기위한 파괴와 살육을 막기위한 살육이라는 쉬이 어귀가 맞지 않는 모순 등 많은 헛점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장황한 162분의 러닝타임동안 관객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데는, 빼놓을 수 없는 CG의 힘과 감독의 극을 이끌어가게하는 능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의 기술은 관객들의 눈을 잡아떼는데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3D로 구현된 영상 또한 눈을 만족시키며 현 영상기술에 황홀경을 느꼈죠. 한 해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발전하는 할리우드의 기술력은 과연 어디까지 진보할 것인지 기대하게 만듭니다. 10년 정도 뒤 영화라면 어디까지 발전할까요? 감독의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도 합격을 주고 싶습니다. 언급한 것처럼 투박할지 모르는 주제도 여전히 의미있게 관객에게 다가오고 지루할 틈을 가지지 않게 하거든요. 이 영화를 보고 제임스 카메론에게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 사실에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p.s
디지털 3D영상으로 관람했는데 가능하면 용산이나 왕십리의 아이맥스에서 보았으면 더 나을뻔 했습니다. 뛰어난, 너무나도 뛰어난 영상미가 작은 스크린에 갇혀있는 모습은 거대한 상어가 작은 수족관에 갇혀있는 모습이랄까요? 이런 영상에는 그에 걸맞는 관람시설이 반드시 필요해요!
무더운 어느 여름날, 열세 살의 브리오니 탈리스는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언니 세실리아가 옷을 벗어던지고 정원의 분수대에 뛰어드는 것을 목격한다. 자매의 어릴 적 친구이자 케임브리지에서 얼마 전에 돌아온 의사 지망생 로비 터너가 그런 세실리아를 지켜보고 서 있다. 그날 하루가 끝날 무렵, 칼리스 저택의 영지에서는 또다른 한 소녀가 강간을 당하고, 이때부터 세 사람의운명은 생각지도 못했던 엇갈림을 겪게 되는데……
*소설 및 영화의 스포일러를 담을 수 있습니다.
어톤먼트는 부커 상의 수상자이기도 한 이언 매큐언의 소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대표작이며 최고 걸작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크게 세가지 부분과 에필로그 형식의 추가문이 있어요. 전체적인 내용으로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아직 성숙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자신이 지켜본 것을 넘겨짚고 그것이 '진실'이라 생각한 뒤 행동해 자신의 언니인 세실리아와 그의 남자친구 로비를 파멸로 몰아가는 이야기에요.
제1부에는 브리오니가 평생 잊지못하,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죄를 짓게 되는 과정이, 제2부에는 브리오니의 행동으로 인해 파멸을 맞은 로비가 전쟁터에 나가 고통받는 과정이, 제3부에는 브리오니가 간호사가 되며 자신의 죄를 씻고자 애쓰는 과정이 들어있어요. 에필로그에선 나이 든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어요.
이 소설의 제목이면서 가장 큰 모티브인 '속죄'를 위한 죄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답니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잘못된 폭로 이전에 본 행동 등을 이해할 능력이 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그녀는그러한 상황에서도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받아들였고, 이 생각 짧은 인식은 뒤에 나오는 그녀의 '죄', 즉 로비에 대한 폭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는 어쩌면 브리오니로부터 가해진 일종의 폭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로비는 한 아이의 상상력이 휘두른 폭력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채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브리오니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상상의 폭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비를 사회적인 폭력인 전쟁까지 몰아내 버립니다.
["그러면 네가 그를 본 거구나."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네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자. 지금 네 말은 네가 그를 보았다는 거지?"
"네, 내가 그를 봤어요."
"지금 네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니?"
"네."
"네가 네 눈으로 직접 그를 보았다는 거지?"
"네, 내가 그를 봤어요. 내가 그를 봤어요."
259p]
한 개인인 로비는 전쟁에 참전한다 하더라도 모두의 축복 속에 세실리아와 함께 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브리오니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는? 모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을 박탈한 것도 모잘라 사회의 저주까지 가져왔습니다. 이런 행동에 무엇을 느껴야할까요. 우리는 브리오니를 그녀의 행동만큼 저주해야 할까요?
제2부에서 로비는 브리오니가 케임브리지로 가지 않고 간호사 수업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로비는 '죄' 이전의 브리오니를 기억해봅니다. 사춘기 소녀의 지나가는 충동적인 감정이었는지 몰라도 브리오니는 자신을 사랑한다고까지 말 했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로비가 좋아하는 것이 세실리아라는 점을 알아차렸죠. 거기서 발생한 실망과 절망이 분노로 바뀌었고 자신에게 앙갚음할 기회를 가졌다고도 이해하려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로비는 결코 그녀를 용서까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애에게 진 빚을 두고두고 되갚아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애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애와 같은 장소에 머물 수 있을까? 브리오니는 그의 무죄 입증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쳐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그애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며, 양심상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지자 자신의 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고마워해야 할까? …… 프랑스에 오고 나서 가장 추웠던 어느 겨울날, 로비는 코냑에 엄청나게 취해 그애를 총검으로 찌르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이성적이지도 않았고, 그저 브리오니를 계속 증오하려는 데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그에게 힘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323p]
로비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잘못된,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의 행동 그것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까지 말했던 소녀의 망상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브리오니가 자신의 행동을 단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면 로비를 전적으로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브리오니는 행동을 바꿨어요. 몇 년이 지나고, 과거의 행동을 되짚어 보면서 올바른 통찰력과 판단력을 갖추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했는지 자각하게 된답니다. 그 반동으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속죄의 삶, 간호사로서의 고행을 택하기까지 하죠.
브리오니는 처음의 잘못 이후론 계속 자신의 죄를 잊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덫에서 자신이 고통을 준 사람들 못지 않게(브리오니 입장에선 못지 않다는 표현을 쓸 수 있겠지만 로비와 세실리아의 입장에선 여전히 충분치 않다 생각할지 모르겠죠?) 자괴감과 족쇄 속에 자신을 가두어 갑니다. 그녀는 시간이 나면 세실리아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찾아가려 하기도 합니다. 그녀를 마주한다는 사실이 어찌 생각하면 브리오니에겐 큰 고통이겠죠. 자신이 파멸시켜버린 사람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에게 먼저 용서를 빌고 찾아가려 하기도 하면서 그녀는 큰 용기를 보여줍니다. 또 맨 먼저 그녀가 쓴 소설은 다름 아닌 '분수대 옆의 두 사람'입니다. 바로 자신의 자전적 얘기를 다룬 소설이죠. 이렇듯 브리오니는 글 내내 자신의 죄를 짊어진 채 힘겨워하기만 합니다. 물론 한 잘못을 저지른 개인이 그에 따라 힘겨워 한다고 모두 그 죄를 사해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브리오니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미래나 다름 없는 진로 자체를 결정하며 속죄를 하고자 하며, 죽기 직전이나 다름 없는 77살까지 이 이야기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 정도면 그녀를 용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저주는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승객들은 보이지 않았고, 이젠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았다.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진술서를 작성하는 일은 금방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선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겠지.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알고 있었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새로운 원고, 속죄를 써야했다. 그리고 그녀는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491p]
그런데 결말 부분을 보면 꽤나 독특합니다. 지금껏 이끌어 왔던 내용은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는 77살의 노인의 회고성 소설이었다라는 결말이에요. 심지어 앞서 결말내렸던 브리오니와 로비, 세실리아의 대면 장면은 허구라는 사실도 말해줍니다. 결국 브리오니는 용기가 없어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런 엔딩으로 글을 마감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도 마지막까지 그녀를 짓누른 죄의식의 한 부분이라 보입니다. 그녀는 이것이 나약함이나 도피가 아닌 마지막 친절이었고, 절망에 맞서 싸운 투쟁이라는 변명을 해보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자신을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고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브리오니를 어떻게 다시 봐야 할까요? 브리오니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연인을 파멸시킨 뒤, 상상력 속에서나 그들을 맺어줍니다. 여기서 그녀를 욕하기만 해야할까요? 과연 자신의 입장이 된다면 브리오니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이는 어쩌면 너무도 인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라면, 그만큼 자신을 돌아보고 그 죄의 크기만큼 눌리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정말 위험한 범죄자가 되는 것이겠죠.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는 이렇지 않습니다. 그만큼 큰 죄의 바위에 눌려 질식하거나 도망쳐 버리는 것이 보통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요. 시간이 지난 뒤 글로써 자신의 죄를 비는 브리오니를 결코 흘겨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세실리아를 만나기엔 너무도 두려웠을 그 모습을, 그리고 숨막힐만큼 자책하며 그를 잊지 않고 끝까지 용서를 비는 모습은 브리오니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들기엔 다른 생각할 관점을 심어주지 않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줄거리와 캐릭터에 대한 부분 말고도 이언 매큐언의 글을 풀어가는 솜씨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는 책을 손에 잡은 뒤 내내 놓지 못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1/3정도가 순수한 심리묘사로 가득한 이 책은 주인공들의 심리를 쫓아가는데만도 상당한 흥미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곧 영화로 이어졌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가장 좋은 특징인 문장의 아름다움과 시간적 변화, 내면적인 독백 등이 주가 된, 이 내면적인 소설은 대화와 행동이 주가 되는 영화화에선 내면적인 느낌을 전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이를 이언 매큐언이 직접 각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작에 참여하면서 잘 조율하며 영화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가능한한 원작에 충실하게, 그리고 이 책이 명작이 된 요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합니다.
이에 따른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매력적인 수준입니다. 각색된 이야기에서 배우들은 원작에서 보이는 내면 독백 등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차용한 듯 보입니다. 이는 배우들이 각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일면을 살펴보면 DVD타이틀에 있는 제임스 맥어보이와 키이라 나이틀리가 더 알려진 배우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선 브리오니 역을 맡은 세 배우를 주목하면 그 감동이 더 커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인 바네사 레드글레이브는 진정성 있는, 그리고 어떻게라도 속죄하고 싶어하는 노년의 브리오니를 보여주었고 로몰라 게리는 자신의 잘못에 눈을 뜨고 그 잘못 속에서 괴로워하는 초년의 브리오니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13살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혼돈에 가득차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유년의 브리오니를 연기한 시어샤 로넌의 연기를 보는 것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또 이 작품은, 아카데미에선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주제가 상을 수상하고,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주제가 상,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잘 짜여진 영화이기도 합니다. 책과 함께 비교하며 보면 어떨까요?
'천사와 악마' 이는 댄 브라운의 소설이며 유명한 '다빈치코드'의 전작이기도하다. 원작 소설이 전세계 45개 언어로 번역될만큼 사랑을 받고, 큰 성공을 거두게되자 곧 영화화에 들어가게 된다. 원작 소설의 순서는 '천사와 악마' 이후에 '다빈치코드'로 이어지지만, 영화로는 반대로 제작되게 된다.
영화 '다빈치코드'는 개봉 첫주에 전세계 흥행 수익 2000만 달러를 달성하면서 역사상 일곱 번째 오프닝 기록을 남겼다. 또한, 2006년 11월 2일에 758,239,851 달러의 수익을 기록하며 2006년에 두번째로 높은 수익을 거둔 영화가 되며 큰 인기를 끌게되자 '천사와 악마'도 영화화에 들어가게 되고 2009년 5월 전세계 동시개봉을 하게 된다.
포스터
먼저 책을 접했던 나는 이 작품에 상당한 기대를 했다. 원래 원작 소설을 본 뒤에 나온 영화는 상상이 깨진다는 생각 때문에 잘 보지 않지만, 과연 책에서의 감동을 어떻게 스크린에 옮겼는지 알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의 좋은 점을 꼽자면 영상미를 꼽을 수 있을것이다. 댄 브라운이 책에서 묘사하고자 했던 바티칸시국 곳곳의 모습, 책에서만 보았던 미술품들의 진짜 모습, 그리고 콘클라베의 모습 등을 관객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멋진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 영화의 개봉 이후로 로마와 바티칸의 관광객이 늘 것 같다는 생각도 섵부르지 않은 생각이 될 것이다.
콘클라베를 준비하는 추기경들
또, 영화의 사운드트랙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사운드트랙은 책의 어떤 묘사로도 완벽한 보완을 할 수 없다. 물론, 독자 개인의 감정으로 보완이 될지 모르지만, 사운드트랙은 관객을 영화에 더욱더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천사와 악마'에서는 이러한 사운드트랙이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가령 긴장이 필요한 시점에선 적절한 몰아치기, 웅장한 곡이 필요할 때는 알맞는 곡의 투입 등으로 관객을 최대한 영화에 빠져들 수 있게 잘 도와주는, 눈이 그리고 귀가 즐거운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한스 짐머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영화인 '이집트왕자', '글레디에이터', '블랙 호크 다운', '배트맨 비긴즈', '다크나이트', 그리고 '다빈치코드'까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재능을 이번 영화에서도 아낌없이 드러냄에 여지가 없다.
배우들의 연기도 짚고넘어갈만하다. 이미 세계적인 명배우인 톰 행크스는 전작인 '다빈치코드'에 이어서 또 로버트 랭던 교수의 역할을 맡았다. 결과론적인 내용이지만, 과연 톰 행크스보다 더 이 역할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속에서 볼 수 있는 교수의 모습은 극을 이끌어나가는데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또 궁무처장으로 나온 이완 맥그리거도 자신이 맡은 이중적인 인물을 표현하는데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데는 무난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이들 말고도 전체적인 배우들의 연기는 대체로 나쁘지 않다. 이들의 호흡이 스토리와는 별개로 극에 관객을 끌어들였다면 충분히 성공한 연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완 맥그리거
이 영화는 이렇듯 외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평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영화 그 자체를 돌아보면 썩 좋은 평만 내리기엔 버거워보인다. 우선 '천사와 악마'는 독립적인 예술품이 아닌 원작 소설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기억해봐야한다. 그런데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영화 '천사와 악마'는 그 방향성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 제작에 댄 브라운이 Excutive Producer로 참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책의 내용이 가위질 당해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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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책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CERN의 연구소장인 콜러, 암살자의 묘사와 행동거지, 비토리아의 비중과 그녀의 아버지의 존재, 바티칸 경비대와 BBC방송국의 기자 등 영화를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빠져 있었다. 하나 아쉬운 예를 들자면, 암살자가 BBC의 건터 글릭을 통해 미디어를 조종하고 이를 통해 혼란을 조장하는 장면은 현대인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미디어의 힘과, 이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통해 느낄 점이 있지만 영화에서 암살자의 비중이 극히 줄어듦에 따라 삭제된듯 하다. 이러한 내용이 한 둘이 아니기에 더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과 다르면서 아쉬운점은 가위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 내용에서도 차이를 보이며 영화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소설 '천사와 악마'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 중 하나는 바로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다. 과학은 종교에서 설명하는 세상의 시초를 자신의 힘으로 설명하려하고, 종교와 이에따른 갈등을 겪곤한다.
이러한 내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은 앞서 말한 CERN의 소장인 콜러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과학으로 대변되는 '콜러'라는 인물이 아예 제거되었다. CERN과 교황청의 대립으로 대변되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 사라지게되고, 궁무처장의 감동적인 미디어를 향한 웅변마저 사라진 영화에선 과거 과학의 세력으로 대변되던 일루미나티가 왜 현대에서 복수를 하게되고, 이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즉, 영화는 기초를 쌓지 않고 단순히 재앙을 막아야만 한다는 투의 전개로 표류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에선 콜러와 대변되는 인물로 레오나르도 박사를 등장시킨다. 과학자이며 사제인 그는 과학과 종교의 중간항에 서있는 인물로 그려질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 보이지 않게 되면서 영화는 과학-중재자-종교라는 세 부분 중 마지막 종교의 부분만 남겨놓게 되었고, 앞 두 부분을 실종시키며 탄탄했던 소설의 스토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만 것이다.
영화에선 앞서 말한 내용과 같은 개연성의 부족이 과한과 종교의 대립 뿐 아니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었을 비토리아 역에 대한 의문또한 가지게한다.
비토리아의 아버지로 소설에 등장했던 레오나르도 베트라 또한 영화에서 빠지게 되면서 비토리아의 일루미나티를 막고야 말겠다는 필사적인 이유 또한 없어지고 말았다. 잔인하게 살해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딸이 암살자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설득력이 강하지만, 단순히 반물질을 개발한 과학자가 끝까지 랭던을 따라다니며 도울 필요를 찾기는 영 어려운 것이다. 이쯤되면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는 과연 비토리아라는 인물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까지 나올 수 있다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인지, 바티칸 서고에 랭던 교수가 들어갔을 땐 경호원만 따라갔을 뿐 비토리아는 볼 수 없었다.) 비토리아는 암살자의 악랄한 모습을 더 강조할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극중 비토리아가 납치되고 풀려나는 장면들이 없어지면서 암살자 또한 그 악랄함(?)을 보여주지 못한채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비토리아는 없어도 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가장 아쉬운 점을 꼽자면 궁무처장의 역할이다. 영화에선 그 비중이 상당히 축소되었지만, 제목처럼 '천사와 악마'라는 내용을 담는 인물로는 당연히 궁무처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급박한 내용을 끌고 갔던 그의 역할은 온데간데 없고, 마지막에서야 원작의 내용을 따라하는 모습은 결코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 둘을 모두 가진 '야누스'의 모습이 되기에는 한참 모잘라 보인다. 아까 언급했던 미디어에서의 웅변 장면은 추기경들 앞에서의 웅변으로 대체되었는데, 원작대로 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 대중들에게 천사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뒤에서는 자신을 파괴해 교회를 더 강력하게 하려 했던 악마의 모습, 과학의 선구자인 콜러 앞에서 교회를 위한 파괴를 강조하는 그의 모습을 가지게 편집을 했다면 더욱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천사와 악마의 이미지가 한층 더 강화되어 제목에 맞는 영화가 탄생했을지 모른다. 물론 영화에서는 궁무처장의 상대역을 할 콜러 연구소장이 없었기에 이를 표현한다는 것이 어려웠을 내용이지만, 아예 궁무처장의 상대역을 빼버렸다는 점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 결정으로 영화는 제목과 더 동떨어진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쉽다!
이쯤되면 영화의 러닝타임에 불만을 가질법하다. 감독은 도대체 왜 이런 중요한 내용들을 도려내면서 138분의 시간만을 할애한 것인가?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두 시간 가량으로 스토리를 압축했다면, 원작과 비교한 관객은 상당히 불편할 수 밖에 없다. 더 잘 만들 수 있는 영화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실망감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지난 '다빈치코드'를 영화화 했을때도 이와 비슷한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천사와 악마'도 결코 만족할만한 영화는 아니다. 훌륭한 유산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던져버린 아이를 보는 기분이랄까?
물론, 영화는 책과 다른 매체이고 일일이 책과 다른 점을 짚어가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 될 수 있다. 또 저자와는 다르게 감독으로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을 맞춰가기 위해 영화를 제작했을 것이므로 이 영화 속에서도 그 뜻을 찾아내는 것이 관객의 자세라 생각한다. 그러나 엄연히 원작 소설의 제목을 따온 영화로서, 그리고 아름다운 전개를 가진 스토리를 지닌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는 점에선 상당한 실망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도저도 아닌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닐까하는 아쉬운 점만이 남는 영화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