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어느 여름날, 열세 살의 브리오니 탈리스는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언니 세실리아가 옷을 벗어던지고 정원의 분수대에 뛰어드는 것을 목격한다. 자매의 어릴 적 친구이자 케임브리지에서 얼마 전에 돌아온 의사 지망생 로비 터너가 그런 세실리아를 지켜보고 서 있다. 그날 하루가 끝날 무렵, 칼리스 저택의 영지에서는 또다른 한 소녀가 강간을 당하고, 이때부터 세 사람의운명은 생각지도 못했던 엇갈림을 겪게 되는데……
*소설 및 영화의 스포일러를 담을 수 있습니다.
어톤먼트는 부커 상의 수상자이기도 한 이언 매큐언의 소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대표작이며 최고 걸작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크게 세가지 부분과 에필로그 형식의 추가문이 있어요. 전체적인 내용으로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아직 성숙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자신이 지켜본 것을 넘겨짚고 그것이 '진실'이라 생각한 뒤 행동해 자신의 언니인 세실리아와 그의 남자친구 로비를 파멸로 몰아가는 이야기에요.
제1부에는 브리오니가 평생 잊지못하,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죄를 짓게 되는 과정이, 제2부에는 브리오니의 행동으로 인해 파멸을 맞은 로비가 전쟁터에 나가 고통받는 과정이, 제3부에는 브리오니가 간호사가 되며 자신의 죄를 씻고자 애쓰는 과정이 들어있어요. 에필로그에선 나이 든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어요.
이 소설의 제목이면서 가장 큰 모티브인 '속죄'를 위한 죄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답니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잘못된 폭로 이전에 본 행동 등을 이해할 능력이 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그녀는그러한 상황에서도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받아들였고, 이 생각 짧은 인식은 뒤에 나오는 그녀의 '죄', 즉 로비에 대한 폭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는 어쩌면 브리오니로부터 가해진 일종의 폭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로비는 한 아이의 상상력이 휘두른 폭력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채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브리오니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상상의 폭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비를 사회적인 폭력인 전쟁까지 몰아내 버립니다.
["그러면 네가 그를 본 거구나."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네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자. 지금 네 말은 네가 그를 보았다는 거지?"
"네, 내가 그를 봤어요."
"지금 네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니?"
"네."
"네가 네 눈으로 직접 그를 보았다는 거지?"
"네, 내가 그를 봤어요. 내가 그를 봤어요."
259p]
한 개인인 로비는 전쟁에 참전한다 하더라도 모두의 축복 속에 세실리아와 함께 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브리오니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는? 모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을 박탈한 것도 모잘라 사회의 저주까지 가져왔습니다. 이런 행동에 무엇을 느껴야할까요. 우리는 브리오니를 그녀의 행동만큼 저주해야 할까요?
제2부에서 로비는 브리오니가 케임브리지로 가지 않고 간호사 수업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로비는 '죄' 이전의 브리오니를 기억해봅니다. 사춘기 소녀의 지나가는 충동적인 감정이었는지 몰라도 브리오니는 자신을 사랑한다고까지 말 했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로비가 좋아하는 것이 세실리아라는 점을 알아차렸죠. 거기서 발생한 실망과 절망이 분노로 바뀌었고 자신에게 앙갚음할 기회를 가졌다고도 이해하려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로비는 결코 그녀를 용서까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애에게 진 빚을 두고두고 되갚아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애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애와 같은 장소에 머물 수 있을까? 브리오니는 그의 무죄 입증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쳐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그애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며, 양심상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지자 자신의 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고마워해야 할까? …… 프랑스에 오고 나서 가장 추웠던 어느 겨울날, 로비는 코냑에 엄청나게 취해 그애를 총검으로 찌르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이성적이지도 않았고, 그저 브리오니를 계속 증오하려는 데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그에게 힘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323p]
로비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잘못된,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의 행동 그것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까지 말했던 소녀의 망상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브리오니가 자신의 행동을 단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면 로비를 전적으로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브리오니는 행동을 바꿨어요. 몇 년이 지나고, 과거의 행동을 되짚어 보면서 올바른 통찰력과 판단력을 갖추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했는지 자각하게 된답니다. 그 반동으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속죄의 삶, 간호사로서의 고행을 택하기까지 하죠.
브리오니는 처음의 잘못 이후론 계속 자신의 죄를 잊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덫에서 자신이 고통을 준 사람들 못지 않게(브리오니 입장에선 못지 않다는 표현을 쓸 수 있겠지만 로비와 세실리아의 입장에선 여전히 충분치 않다 생각할지 모르겠죠?) 자괴감과 족쇄 속에 자신을 가두어 갑니다. 그녀는 시간이 나면 세실리아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찾아가려 하기도 합니다. 그녀를 마주한다는 사실이 어찌 생각하면 브리오니에겐 큰 고통이겠죠. 자신이 파멸시켜버린 사람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에게 먼저 용서를 빌고 찾아가려 하기도 하면서 그녀는 큰 용기를 보여줍니다. 또 맨 먼저 그녀가 쓴 소설은 다름 아닌 '분수대 옆의 두 사람'입니다. 바로 자신의 자전적 얘기를 다룬 소설이죠. 이렇듯 브리오니는 글 내내 자신의 죄를 짊어진 채 힘겨워하기만 합니다. 물론 한 잘못을 저지른 개인이 그에 따라 힘겨워 한다고 모두 그 죄를 사해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브리오니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미래나 다름 없는 진로 자체를 결정하며 속죄를 하고자 하며, 죽기 직전이나 다름 없는 77살까지 이 이야기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 정도면 그녀를 용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저주는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승객들은 보이지 않았고, 이젠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았다.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진술서를 작성하는 일은 금방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선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겠지.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알고 있었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새로운 원고, 속죄를 써야했다. 그리고 그녀는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491p]
그런데 결말 부분을 보면 꽤나 독특합니다. 지금껏 이끌어 왔던 내용은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는 77살의 노인의 회고성 소설이었다라는 결말이에요. 심지어 앞서 결말내렸던 브리오니와 로비, 세실리아의 대면 장면은 허구라는 사실도 말해줍니다. 결국 브리오니는 용기가 없어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런 엔딩으로 글을 마감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도 마지막까지 그녀를 짓누른 죄의식의 한 부분이라 보입니다. 그녀는 이것이 나약함이나 도피가 아닌 마지막 친절이었고, 절망에 맞서 싸운 투쟁이라는 변명을 해보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자신을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고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브리오니를 어떻게 다시 봐야 할까요? 브리오니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연인을 파멸시킨 뒤, 상상력 속에서나 그들을 맺어줍니다. 여기서 그녀를 욕하기만 해야할까요? 과연 자신의 입장이 된다면 브리오니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이는 어쩌면 너무도 인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라면, 그만큼 자신을 돌아보고 그 죄의 크기만큼 눌리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정말 위험한 범죄자가 되는 것이겠죠.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는 이렇지 않습니다. 그만큼 큰 죄의 바위에 눌려 질식하거나 도망쳐 버리는 것이 보통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요. 시간이 지난 뒤 글로써 자신의 죄를 비는 브리오니를 결코 흘겨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세실리아를 만나기엔 너무도 두려웠을 그 모습을, 그리고 숨막힐만큼 자책하며 그를 잊지 않고 끝까지 용서를 비는 모습은 브리오니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들기엔 다른 생각할 관점을 심어주지 않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줄거리와 캐릭터에 대한 부분 말고도 이언 매큐언의 글을 풀어가는 솜씨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는 책을 손에 잡은 뒤 내내 놓지 못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게 분명합니다. 1/3정도가 순수한 심리묘사로 가득한 이 책은 주인공들의 심리를 쫓아가는데만도 상당한 흥미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곧 영화로 이어졌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가장 좋은 특징인 문장의 아름다움과 시간적 변화, 내면적인 독백 등이 주가 된, 이 내면적인 소설은 대화와 행동이 주가 되는 영화화에선 내면적인 느낌을 전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이를 이언 매큐언이 직접 각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작에 참여하면서 잘 조율하며 영화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가능한한 원작에 충실하게, 그리고 이 책이 명작이 된 요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합니다.
이에 따른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매력적인 수준입니다. 각색된 이야기에서 배우들은 원작에서 보이는 내면 독백 등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차용한 듯 보입니다. 이는 배우들이 각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일면을 살펴보면 DVD타이틀에 있는 제임스 맥어보이와 키이라 나이틀리가 더 알려진 배우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선 브리오니 역을 맡은 세 배우를 주목하면 그 감동이 더 커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인 바네사 레드글레이브는 진정성 있는, 그리고 어떻게라도 속죄하고 싶어하는 노년의 브리오니를 보여주었고 로몰라 게리는 자신의 잘못에 눈을 뜨고 그 잘못 속에서 괴로워하는 초년의 브리오니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13살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혼돈에 가득차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유년의 브리오니를 연기한 시어샤 로넌의 연기를 보는 것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또 이 작품은, 아카데미에선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주제가 상을 수상하고,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주제가 상,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잘 짜여진 영화이기도 합니다. 책과 함께 비교하며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