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0.03.20 떴다! 오도리
  2. 2009.09.07 Atonement
  3. 2009.07.24 왕자 이야기
  4. 2009.06.22 문학이란 무엇인가
  5. 2008.11.05 괴상한 버릇 2
  6. 2008.05.25 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 Mariner 2
  7. 2008.04.19 발췌
  8. 2008.04.10 발췌
  9. 2008.03.26 지하철에서
  10. 2008.03.07 발췌
  11. 2008.03.03 발췌
  12. 2008.03.02 발췌
  13. 2008.02.27 꼴통들...
  14. 2008.02.26 tears
  15. 2008.02.26 베른... 쥘 베른!

떴다! 오도리

2010. 3. 20. 15:10
링크, 클릭하세요~
떴다! 오도리 1부
떴다! 오도리 2부



요즘은 바야흐로 웹툰의 홍수시대라 할 수 있어요. 어느 포털이나, 혹은 신문사의 웹페이지에선 웹툰을 지원하지 않는 곳을 찾아보기가 오히려 힘들정도로 웹툰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수 십, 수 백개의 웹툰이 매 주 쏟아지는 동시에 그만큼 유명한 웹툰들도 있지만, 아직 클릭 한 번 안해본 웹툰들도 물론 있죠. 그런 숨겨진 웹툰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조용히 구석에 자리해있는 맛집을 찾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해줍니다. 오늘 소개할 '떴다! 오도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조용한 카페같은 분위기의 웹툰입니다.


'떴다! 오도리'는 노처녀에 만년 대리인 오도리를 중심으로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는, 시트콤 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어요. 여기서 보이는 모습들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중심인물들 중 회사 내에서 후배인 신블루에게 사랑을 느껴 어떻게든 노력하는 오도리, 그런 오도리에게 자신의 마음 한 번 제대로 보이지 못하는 허세남 민대충과장, 유학파이며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그만큼 외로워하는 나세련팀장 등 주위에서 어떻게든 '있을법한' 정말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들어있어요.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머란 것은 현실을 우스꽝스럽게 변형시키는 것이라구요. 그만큼 유머의 기본으로 탄탄한 현실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떴다! 오도리를 살펴본다면 이질적이며 과하게 과장된 모습에서 나오는 웃음이라기보단, 정말 내가 겪었을 웃음을 찾아주는 것이죠. 그래서 이를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민대충과장


떴다! 오도리에는 유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등장 인물들이 365일 하하호호 웃기만 한다는 것은 그렇다는 것 만으로도 현실적일 수 없죠. 우리도 살아가며 여러 기억들이 있을테고, 그 중에서도 좋은 기억들이 있는 반면 아련한 기억 슬픈 기억 등 다양한 기억들을 간직합니다. 떴다! 오도리에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일면들도 놓치고 있지 않습니다. 


교훈적이라고 하면 너무 딱딱할까요? 그러나 굳이 그런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든 경험에 '인생수업'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그래, 좋은 경험했다 치자'는 말도 종종 쓰곤합니다. 이렇게 보면 떴다! 오도리에서 보이는 '교훈'적인 모습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웃음, 교훈. 둘 다 좋은 내용들이긴 하지만, 가장 주목할만한 내용은 아무래도 등장인물들 간에 마음의 엇갈림이랄까요? 떴다! 오도리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의 화살표가 엇갈려 있습니다. 당장 떠올려봐도 다섯 명 정도의 인물들이 서로의 뒷모습만 보며 스스로 안타까워하고 있고, 또 그를 보는 우리들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줍니다. 어디서 안그러겠느냐만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인물들은 행동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결말이 어떻게 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에 대한 감상은 독자의 몫이겠죠?


떴다! 오도리의 시즌 1은 Stoo.com에서 연재되었고, 시즌 2는 Enclean.com에서 연재되는 중입니다. 둘의 차이는 흑백과 컬러의 차이랄까요? 그리고 시즌 2는 전 시즌보다 한층 인물들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있는 것이 확연히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더운 격정적인 '드라마'를 본다는 느낌이 더 강한 것도 사실이구요. 

떴다! 오도리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아직은 예상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지금 보여주는 인물들의 모습으로 갈수록 고조되는 감정에 어떻게든 결말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기대가 되고 있죠. 어서 그 결말을 알고 싶군요! (그렇다면 연재가 끝나게 되기에 퍽이나 아쉽겠지만 말입니다.)

Atonement

2009. 9. 7. 03:13

 
무더운 어느 여름날, 열세 살의 브리오니 탈리스는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언니 세실리아가 옷을 벗어던지고 정원의 분수대에 뛰어드는 것을 목격한다. 자매의 어릴 적 친구이자 케임브리지에서 얼마 전에 돌아온 의사 지망생 로비 터너가 그런 세실리아를 지켜보고 서 있다. 그날 하루가 끝날 무렵, 칼리스 저택의 영지에서는 또다른 한 소녀가 강간을 당하고, 이때부터 세 사람의운명은 생각지도 못했던 엇갈림을 겪게 되는데……
 
*소설 및 영화의 스포일러를 담을 수 있습니다.


왕자 이야기

2009. 7. 24. 01:32

※ 스포일러 주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2009. 6. 22. 03:39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목차를 보면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1947년 작가들의 상황’으로 이어지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앞의 두 장을 요약해보면 이와 같다.

 사르트르는 첫 장인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작가라면 독자를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화가는 단지 하나의 모습을 보여줄 따름이고 그것이 전부라 말한다. 그러나 화가와는 달리 작가가 다루는 것은 구별이 필요한 의미라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에 대해 언급한다. 시는 산문과는 달리 말을 ‘사용하는’것이 결코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시인들을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 말하기까지 한다. 시인은 말을 세계의 모습의 ‘기호’로 사용할 줄 모르지만 이런 모습 중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찾아보는 것이기도 한다 말한다. 이와 반대로 산문작가는 작가의 본질적인 임무인 인도를 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본질적으로 실용적인 집단이라 규정한다. 또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했는데 한 사람이 작가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말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또 예술은 앞서 말한 것처럼 참여와 인도를 수반하기 때문에 결코 순수파에 선 일이 없다는 것도 덧붙였다.

 두 번째 장인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에서 사르트르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는 말로 말문을 연다. 작가들의 여러 가지 목표의 배후에는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어떤 더욱 깊고 더욱 직접적인 선택이 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예술적 창조의 주된 동기의 하나는 분명히 세계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존재가 본질적이라고 느끼려는 욕망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글을 읽는 독자가 필요하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는 것이 항상 옳을 수 없다고 한정짓고 있다. 또 사실 문학이란 대상에는 실상 독자의 주관성 이외엔 다른 어떤 실체도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독자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 만들어져야 하는 동시에 이미 만들어져 있고, 작품은 바로 그의 능력 여하에 따라서만 존재할 따름이라 말한다. 따라서 책은 도구처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독자의 자유에 대해서 자신을 목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라 한다. 물론 이 점에서 예술작품이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선 사르트르는 동의하지만 예술작품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사르트르는 문학을 단순한 글의 나열로 보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작가가 독자를 특정한 의도로 인도한다는 점이나 예술작품 자체가 목적이라는 내용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나도 글을 가끔 써보기에, 사르트르의 입장에 동의한다. 작가의 창작물은 결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만을 위한 작품이라면, 그 내용은 결국 자신만이 알면 되는 것이기에 머릿속에서 증발해 버려도 별 상관이 없지 않은가? 문학 작품은 탄생할 때부터 의미를 가지고, 태생적으로 독자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 그 중에서도 문학은 결코 순수한 것만은 아니다. 독자를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언제나 숨어있기 때문이다.


괴상한 버릇

2008. 11. 5. 03:32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 가지 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어른들에게 무슨 꾸중을 들을 일이 있거나 하면 지레 겁이 나서 곧잘 광 속 같은 데로 숨어들어가 잠이 들어버린 척하곤 했다. 꾸중을 들을 일뿐 아니라 부끄럽고 난처한 일이 있을 때도 늘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그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없으면, 으레 녀석이 또 무슨 일통을 저지른 게로구나 짐작을 했고, 집 안을 이리저리 뒤져서 녀석을 찾아내 놓고 보면, 그때마다 어른들의 그런 짐작은 빗나간 일이 거의 없었다. 한데 그가 걸핏하면 광 속 같은 데서 잠이 들어버린 척하는 것은 그저 그런 식으로 잠을 자는 척하고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잠을 자는 척하는 요령이 더 괴상했다. 잠을 자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숫제 죽은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목과 사지를 보기 흉하게 축 늘어뜨리고서는 사람이 가까이 가도 통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몸을 비틀어대도 정말 죽은 사람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건드리는 대로 몸을 흔들거리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로 그런 장난 때문에 더욱 심한 꾸중을 듣곤 했다. 하지만 꾸중을 들어도 '그'의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질 않는다. 나중에는 숫제 그 버릇이 동무들과의 놀이로까지 변해 가고 있었다. 걸핏하면 아무 데서나 벌떡 뒤로 나자빠져서는 '나는 죽었다'고 앙징스럽게 숨을 한참씩 끊어버리는 바람에 옆엣 친구들은 슬그머니 겁을 먹기도 했다. 이윽고 '그'는 초등학교 입학을 하게 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다시 중학교를 다니게 되지만 그 버릇만은 여전히 고치려고 하질 않는다. 나이를 먹어 가면 갈수록 '그'에게선 오히려 그 괴상한 버릇이 나이만큼이나 더 익숙해지고 완벽스러워져 가는 것이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될 무렵쯤 해서는 그것이 하나의 진지한 휴식술로 발전되고 있었다. ‘그’는 집 안이나 학교에서 무슨 낭패스러운 일만 당하고 나면 으레 자기의 어두컴컴한 골방으로 들어가 몇 시간이고 그런 가사상태를 지속하면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기분이 너무 암담스러워질 때도 그랬고, 흥분을 하거나 긴장이 될 때도 그랬다. 그는 이제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이 놀라울 만큼 길어져 있었고, 그렇게 숨을 참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정말 숨을 끊어버린 것인지 어쩐지도 잘 알 수 없을 만큼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숨을 조금도 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배를 들먹이지 않고 코끝으로만 조금씩 조금씩, 아주 은밀스럽게 공기를 들이마시는 연습에 그만큼 육신이 익숙해져 있는 까닭이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가 그렇게 숨을 참고 누워서, 나는 정말로 죽은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것처럼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최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가 그렇게 생각을 정해버리고 나면 아무리 절실하게 급한 일도 정말 급한 것 같지가 않고, 불쾌한 일도 더 이상 불쾌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가사상태 속에서는 처음부터 무슨 절실한 일이나 불쾌한 일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그런 생각 자체가 호흡을 잃어버린 육신 속에서 함께 죽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 이상 완벽한 휴식의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때의 버릇은 이제 ‘그’에게서 그런 휴식의 방법으로까지 발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도 하고 난 다음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이젠 ‘그’의 생활이나 주변이 전보다도 훨씬 복잡해지고 낭패스러운 일도 그만큼 많아졌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긴장이나 피로가 더욱 자주 찾아왔고, 그때마다 ‘그’는 그것에서 도망치기 위해 자주 그 가사의 잠을 자야 했다. 그 시간도 더욱더 길어져갔다. 어떤 때는 그 가사의 잠이 하루 종일 계속되는 때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속이 상해 죽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버릇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청승맞고 끔찍스럽기만 했다.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꼴만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한데 그러던 어느 날, 이날부터 ‘그’의 아내는 남편의 그 망칙스러운 꼴을 더 이상 견뎌야 할 필요가 없어지고 만다. 물론 이혼을 해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의 버릇에 드디어 고장이 생긴 것이다. 고장이 생긴 건지 일부러 그랬는지는 끝내 알려지지 않고 말지만 하여튼 이날도 ‘그’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이 몹시 우울해져가지고 와서 또 그 가사의 잠을 시작한다.

“저런 꼴로 늘 죽어 눕기가 소원이람 차라리 정말로 한번 죽어보기라도 하라지.”

‘그’가 막 그 가사의 잠을 시작했을 때 ‘그’의 아내가 혼자 무심히 그렇게 중얼거린다. 한데 ‘그’는 정말로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영영 그 가사의 잠에서 깨어나질 않고 만다…….



이청준作
"소문의 벽"中

로빈슨 크루소
원제 :  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 Mariner by Daniel Defoe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그의 신기하고 놀라운 모험]

(1993년 발행, 김병익·최인자 역[순서대로 상하권], 문학세계사)

<리뷰가 스포일러를 담을 수 있으니 주의하길>

책을 한무더기 쌓아놓고 아직 보지 않은 책들이 많긴하다. 그래서 요즘은 사놓은 책들을 하나하나 읽으려 노력한다. (제일 먼저 볼 것은 며칠전에 산 열림원 쥘베른 전집의 신작인 황제의 밀사겠지.)

하지만 얼마전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찾던중 내 눈에 띈 책이 있었다.
바로 로빈슨 크루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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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찍은 사진

사실 주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사람이 과한 욕심으로 뱃길에 나섰다가 28년동안 무인도 생활을 하게되고, 결국 극적으로 자신의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중앙도서관의 책꽂이에 있는 모습을 보니 흥미로운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는 그정도가 전부인데 상,하권이나 있다는것을 보고는 어떻게 스토리가 부풀려졌는지, 내가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어떻게 다른지 한번 알아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주저없이 책 두권을 뽑아들고 대출을 하면서 책의 목차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얘기는 상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 이해를 위해 하권의 목차를 한번 써보자.


나의 섬을 다시 찾아가다
스페인 사람들과 반란자들
다시 나타난 야만인들
대전투
스페인 사람들이 받은 대접
섬에서의 결혼식
윌 에킨즈의 회개
프라이데이의 죽음과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싸움
나 없이 항해를 하다
중국으로 가는 길
중국 횡단 여행
타타르 족 사이를 지나가다
시베리아와 러시아를 지나 고향으로 돌아가다


여담이지만 나만 그랬을지는 몰라도 중간의 프라이데이의 죽음이라는 소제목은, 책을 읽기 전에초대형 스포를 당한 기분이라 아직까지 읽기가 꺼려질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중국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관심이 없었던 내가 바보스러워질만큼 말이다.

어쨌든 일단 상권은 빠르게 읽어 나갔고 하권도 잡고 있으니, 리뷰라긴 뭐하지만 느낀점을 쓸 최소한의 여건은 된다고 생각하고 마저 써보기로 하자.

어렸을 적 문학 전집등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빠져있으리란 생각은 하기 어렵다. 그만큼 모두들 잘 아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로빈슨의 고립과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고된 노력, 그리고 동료를 얻고, 전투를 치룬 뒤 탈출에 성공하는 모습까지. 그런데 압축된 내용만을 읽은 사람이 대부분일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원래 내용 하나 하나에 들어있는 의미가 이 시점의 나에게 꽤나 새롭게 다가왔다. 그 예를 한번 꼽아보자면 신앙심에 대한 장황한 언급이 그 중 가장 크다 할 것이다. 18세기 영국인의 글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적인 냄새는 지울 수 없겠지만, 현재 내가 보기에는 깊은 생각이 필요할만큼 이 현상이 강하다. 가령 로빈슨이 무슨 일을 하나 하고나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신을 찾는다던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등의 언급이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점을 꼽아보자면,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진취적인 영국인의 이미지를 재확인함과 로빈슨을 통해 나타난 서구 중심주의의 재발견이 뚜렷이 보인다. 다니엘 디포는 로빈슨을 통해 토인의 식인 문화를 읽어낸다. 이에 대해 로빈슨은 어찌 생각하면 우유부단해 보일만큼 처음에 결론을 확실히 짓지 못한다. (이와 관련해 심리적 갈등이 꽤나 볼만하다) 그러나 결국 프라이데이를 구하면서 야만인들에 대한 심판을 내린다. 이 대목중 기억 나는 부분을 써보자면 이렇다

- 그러나 금방 말한 그 잔인한 야만족과 서로 잡아먹는 추악하고 흉칙한 짐상 같은 풍습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이 가슴에 깃들어 있어서 기억을 씻지 못하고 우울한 기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6.pg[상권]
- 더구나 내 정신은 복수심으로 2,30명을 칼로 찔러 죽이는 유혈의 통쾌함을느꼈다. 나는 사람을 잡아먹는 야만인들이 놀던 장소와 흔적을 볼 때마다 공포감에 떨었는데 그만큼 내 원한도 더욱 깊어졌다.…… 199pg[상권]

이 부분들은 로빈슨이 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까지 하게 되는 부분을 나타낸 부분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로빈슨은 이에 대해 종교적인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껏 서구의 윤리의 측면에서 야만인(이 말 자체도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문화가 다르다는 점으로 야만적이라는 말을 꼭 써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이 단어를 계속 쓰겠다.)들을 증오까지 하게 되었다면, -그 윤리의 바탕은 분명 기독교일 것이다.- 이제 기독교의 관점에서 다시 그들을 생각해 본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좀 길진 몰라도 읽어볼만 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의 괴상한 풍습을 보고 공포로 말미암아 처음엔 타오르는 격정만 느꼈지만, 사실 그들 죄에 대해서는 전혀 깊이 검토해 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방법으로만 그들의 잔인하고 타락한 야망을 불태우게 된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님이 묵인해 주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악습은 없어지지 않고 대를 거쳐 내려오지 않는거? 또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고 지옥에 떨어질 만큼 타락한 자연의 본성에 쫓겨 이처럼 잔인한 일을 행하고 무서운 풍습을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점까지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까 말한 것처럼 오랫동안,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아무런 소득없이 멀리 순찰하는 일과에 진력이 나기 시작하자, 내 행위 자체에 대한 견해가 바뀌면서, 보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정말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권한과 사명감이 있다고 그들을 심판하고 처형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죄는 하나님이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런 처벌도 주지 않고 몇 세대 동안 내려온 게 아닌가? 또 어떻게 보면 그들 스스로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도록 한 것이라 여겨지지 않는가? 그들은 내게 어떤 피해를 입혔는가? 나는 무슨 권리로 그들끼리 하는 무차별한 피의 분쟁에 가담하려는가? 혼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심사숙고했다.이 특별한 경우를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심판하는가에 대해 어떻게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200-201pg, 상권]

이렇게 로빈슨의 생각을 들여다 보면 다니엘 디포의 생각도 언뜻 볼 수 있다. 서구 윤리의 입장에서만 외부 세계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를 토대로 다시 한번 밖을 내다보자는, 어찌보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각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책 내용을 봤다면 내가 빌린 책을 한번 다시 봐보기로 하자. 이 책은 93년에 출판되어 바로 그 다음해에 학교 도서관에 들어온 듯 하다. 인증샷이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책을 열자마자 오래된 책의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꺼리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역하게 느껴질만큼 말이다. 이만큼 다른 사람들이 많이 보았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넘기는데 한장 한장마다 반가운 표시들이 보였다. 바로 독자들의 주석을 보았다는 점이다. 학교 입장에서는 달가워 하지 않을 단순한 낙서(전화번호나 이름, 과 같은 정보들)들 부터 이 책을 보고 느낀점을 상세히 쓰거나 중간 중간에 주석을 단 점은 e-book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느낌일 것이다. 물론 인터넷으로 바로 댓글을 확인할 수 있고 더 빠른 측면이 있지만, 오래된 책의 세월과 함께 께적거린 주석을 읽은 기분과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 이만 이에 대한 생각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이제 하권을 반납일까지 마저 읽고 황제의 밀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발췌

2008. 4. 19. 02:45
너희는 우리가 사적 소유를 청산하려 한다고 경악한다.
그러나 너희의 기존 사회에서 사적 소유는 구성원의10분의 9에게는 이미 폐지되었다.
사적 소유가 10분의 9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사적 소유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너희는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무소유를 필수 조건으로 전제하는 소유를
우리가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너희는 우리가 너희의 소유를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다.

by Marx


공산당선언의 일부이다.
흔히 말하듯이 마르크스 이론의 실험은 소련의 붕괴와 함께 무너졌다고 한다.
그런데 소련을 위시한 제 2 세계는 과연 공산 사회가 맞았던 것인가?
내 짧은 소견으로는 글쎄라는 대답밖에 못하겠다.
과연 스탈린주의가 마르크스주의가 맞는것인지?

아, 그리고 언제봐도 이 아저씨의 필력은 소름을 돋게 한다.
토황소격문을 본 황소의 심정이랄까 -_-;

발췌

2008. 4. 10. 15:24
Marx 曰
"시간은 인간의 발전을 위한 공간이다.
마음대로 처분할 자유시간이 없는 인간,
단지 잠자고 먹고하는 육체적 중단을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모든 시간을 자본가를 위한 노동으로 흡수당하는 인간은
역축보다 못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 41pg에서 발췌]

지하철에서

2008. 3. 26. 22:54
지하철에서 자본론을 보면
개념남 vs 겉멋든좌빨???
결론은 ???

(물론 흔들리는데서 100%이해는 바라지도 않고
절반만 이해하자는 생각이었는데
그정도는 무난할듯 ㅇㅇ)




D-12

발췌

2008. 3. 7. 20:11
 이런 행태에 반대해야 할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세계의 수십 억 인구를
목마름, 배고픔, 질병, 전쟁으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고통과 파괴를 빤히 쳐다보면서 어떻게
"노!"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모래 한 알이라도 던져 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by 하이디 줄리아니 (2001년 7월 20일 제노바에서 열린 G8회담도중 경찰에 의해 살해된 카를로 줄리아니의 어머니다)


*'야만의 주식회사 G8을 말하다'중 발췌

발췌

2008. 3. 3. 22:57
 국가의 정치와 정치가들에 대한, 점증하는 무관심과 냉소주의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정치가들은 이제 특별 계급으로 인식되어, 여론이나 대중의 관심사를 대변하는 대리인이라기보다 "신사복suits"혹은 출세주의자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정당의 당원수도 크게 줄어들었다. 선거는 이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언론을 통해서 치러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정당들은 충성스러운 당원들보다는 부유한 기증자들을 더 원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늘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점점 더 그들의 지지자들을 통제하는 쪽으로 움직여가고 있다. 장관들은 전문 홍보 전문가들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는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 선거운동 집회에는 충성스러운 당원들만 참가하는 것으로 제한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텔레비전 카메라가 열관하는 지지자들의 모습을 비춰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떻게 하다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 닉슨이 일방적으로 달러 태환제도를 폐지한 직후, 뉴 라이트가 집권을 하면서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의 통제를 철폐해버렸다. 먼저 영국과 미국에서 그렇게 했고 이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때부터 자본의 소유주가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
권력은 유권자와 노조로부터 주식 소유주와 채권 소유주 쪽으로 꾸준히 넘어갔다. 미국 정치학자 필립 그린이 말한 "의사 민주주의pseudo-democracy"의 새로운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야만의 주식회사 G8을 말하다'중 발췌

발췌

2008. 3. 2. 18:19
... 기업의 사장들은 오래 전부터 일반 대중에게
"무용성의 철학"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생의 무목적성" (인생이란 다 그런 거 아니야?)
"물품소비등 피상적인 것에의 집중"
따위를 안기려고 노력해왔다. 어릴 때 부터 이런 프로파간다에 노출된 사람들은 무용성의 철학과 생의 무목적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한다는 저 "우스꽝스러운"철학 따위는 잊어버리는 것인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마법사들에게 맡겨버린다. 정치적표현을 써보자면,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자칭 "지적인 소수"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야만의 주식회사 G8을 말하다'중 발췌

꼴통들...

2008. 2. 27. 18:38
 아무래도 근래에 읽던 '부활'은 주인공들의 이름이 어려운 탓에 잘 읽히지 않는 기분이 들어서, 새로 책을 잡았다.  바로 이 '꼴통들과 뚜껑 안열리고 토론하는 법'이라는 책이다.
처음엔 단순히 흥미위주의 책이겠거니 했지만, 리뷰들을 보고
논리적으로 상대와 토론하는 법을 쓴 책이라길래 두 권을 한번에 샀지.
사실 논증이란 주제만큼 흥미로운건 많이 없다고 본다. (그래도 지리만큼은 아니겠지만)
평소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구사하는 놀이를 해오는 나에겐
책의 제목, 주제, 내용 이 세개가 모두 흥미롭게 다가온다.
과연 이 책을 보고 꼴통들과 제대로 논증을 할 수 있을까?
두고봐야 알겠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tears

2008. 2. 26. 23:20

책을 보고 눈물을 흘려본 적 있나?
난 아직 두 번 밖에 없어

첫번째는 아Q정전을 보고였지
사실 처음 그 책을 봤을 때는 그냥 별 감흥이 없었지
이게 왜 명작인가 하고
그런데 다시 한번 더 보게 되었을 때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다가왔어
'아Q'는 단순히 개인이나 중국인만의 아픔을 보여주는 화자가 아니야
'아Q'는 당시 세계가 제국주의의 논리 밑에 편입되면서
고통을 겪는 식민지인들의 슬픔또한 보여준다 할 수 있지
그리고 조선을 생각해봤어
조정은 무능해 백성은 굶주리고 나라를 빼앗기고...
그 피해를 지배층이 봤을까?
아니 '아Q'같은 백성들이겠지
그 생각을 해보니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오더군

두번째로는 조세희 선생님의 일명 '난쏘공'연작을 보고야
'난쏘공'은 너무나 잘 알테니 다른 설명은 필요 없겠지?
소설속에 나오는 '낙원구 행복동'의 사람들을 보며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가는가
그들이 잘못한게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21세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자신들을 묶던 사슬을 풀었을까?
라는 생각들을 하니 어느새 눈에 눈물이 고이더군

혹 이글을 본다면 자신이 눈물날만큼 봤던책이 있나 생각해봐

베른... 쥘 베른!

2008. 2. 26. 21:36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저 이 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 15소년 표류기등...
저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한번쯤은 들어본 제목일거야

 제목에서도 밝힌것처럼 그 작가는 쥘 베른이야
SF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작가지!
활동 연대는 19세기말의 작가야

 서두에서 밝힌 작품이름들을 떠올려 본다면
'아동 sf전문 작가 아닌가?'라고 생각해 볼 수 있어
게다가 그의 책을 찾으려면 청소년 교양서적 코너에서야 발견할 수 있지
하지만 한번이라도 그의 작품을 깊이있게 들여다 본다면
오히려 아동을 위한 작가가 아니라 성인이 봐야 할 작품이라 봐야해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을 보다보면 뒤통수를 후려치는 블랙 유머와 함께
과학기술에 대한 전망등을 본다면 오히려 어린 독자층이 어려울 수 있어

 베른한테서 발견 할 수 있는 놀라운 점은
현대 과학기술을 이미 백년 전부터 내다본 놀라운 통찰력이 있어
가령 큰 것에선 로켓추진으로 달에 간다는 설정
(사실 이것은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미국의 과학자들이 베른의 소설을 읽고 로켓을 이용한다는 설정에 착안해서
현재같은 우주비행선을 만든거니까 말이야 ),
수소 에너지의 도래, 잠수함의 실용화등 작은 것을 보자면
대서양 해저케이블 (당시 수차례의 실패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어)등을
꼽을 수 있어

 여기서 바로 베른 작품의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어찌보면 단순한 사건, 비슷한 사건들의 나열이라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위트와 사건의 해결에서 나오는 쾌감은 그 상상을 뛰어넘어
그리고 덧붙이자면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소설에서 알 수 있듯이
'포탄'이라는 밀폐된 공간만으로 책 1권을 끝내는 천재성은 경이롭지

 베른 문학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해보자면
전기의 작품과 후기의 작품의 색깔이 완전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야
1870~71년에서 있었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본진마저 털려서 배상금과 함께 알자스-로렌 땅덩이를 줄 만큼 큰 피해를 봤지
전쟁 전의 작품인 "지구 속 여행"에서 나온 독일인 교수 '리덴브로크'는 단점이 있지만
도저히 미워 할 수 없는 캐릭터인, 쉽게말해 무해한 마스터(!) 버전이라 할 수 있지만
전후 작품인 "인도 왕비의 유산"의 '슐츠'교수는 그 잔인무도함에 몸서리쳐짐을 금할 수 없어

 또한 단순한 SF작가로 봐준다면 좀 슬픈일이야...
혹시 "황제의 밀사"란 소설 들어봤어? (굳이 황제의 밀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베른의 소설을 압축해 놓은게 아닌 원본으로 읽었어도 충분해)
그런류의 소설을 보면 과학의 기술은 베른특유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장치라고만 봐도 충분해 (자세한건 읽어봐 )

 물론 베른에게 약점이 없는건 아니야
가령  항상 초인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그를 따르는 충실한 동료(하인도 빼 놓을 수 없지)와 함께 결국 해피엔딩이라는
어찌보면 베어벡의 뻥축구 만큼 결말이 보인다 할 수 있어
(이 설정을 보면 마치 닥터가 연상되지 않아? )
게다가 심리묘사같은 것은 이뭐병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치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그림같은 배경묘사와
비슷한 인물배치로도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그림자를 보이지 않을만큼 눈부신 햇빛같은 능력을 가진 소설가라고 할 수 있어

 혹 이 글에 홀려서 베른을 더 깊게 읽어보고 싶은 횽들은
열림원에서 나온 쥘 베른 전집을 추천해볼게
나는 잘 몰랐는데 '김석희'선생님이라는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하신 분이라더군
번역에 감칠맛이 정말 대단해! 단점이라면 아직 작업중이라
시리즈 중 9권의 책밖에 나오지 않았다는거야... (새 책나오는 딜레이가 좀 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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